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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8. 6. 03:29 - 가루비0404

[은혁/동해] 천사줍줍

(Devil이라는 주제로 진행되었던 합작을 위해 적었던 글입니다! 합작이 공개되서 글을 공개로...!

askfro.tistory.com/29 <- 요기 가시면 더 많은 작가님들의 글을 보실 수 있어용^.~)

 

 

 

 

비가 제법 많이 내리고 있었다. 원래 이런 축축한 날을 좋아하기도 하고 해서, 마트에 들렀던 혁재는 꽤 무거워보이는 장바구니를 한 손으로 들고 다른 손으로 우산을 든 채 기분좋게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거기. ”

 

 

그러다 들려온 청명한 목소리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아마 지금쯤 집에서 방에 틀어박혀 영화나 보고 있을 종운이 아니라면 이 곳에서 자신을 부를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고갤 갸웃하다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악마들은 원래 다 저렇게 잘 생겼나? ”

 

   

그런데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악마? 날 알아? 이 근방에 자신과 같은 이가 있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던 혁재인지라 이건 또 뭔가 싶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갤 돌렸는데 그 곳엔 하얗게 빛나는 날개를 활짝 편 채로 공중에서 30cm 가량 떨어져 있는 천사가 하나 있었다.

, 인간들한테 들키면 어쩌려고. 이계의 존재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키면 안 된다는 규율을 깨면 당장이라도 원래의 세계로 붙들려 갈텐데 간도 크다 생각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았다. 아무래도 저 천사는 제 정체를 숨기는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것 같았다. , 4급 오으수스 정도 되려나.

 

 

계급이 높은가봐? ”

그래. 오으수스야. ”

... ”

“ ? ” 

“ ? ”

 

 

정체를 알았으니 이제 가던 길을 마저 가려는데 자신만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 시선이 혁재의 발목을 붙잡았다. 결국 혁재는 다시 고갤 돌려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 ”

불쌍한 오으수스가 무방비 상태로 일행도 없이 날개까지 편 채 악마 앞에서 날아다녀. 그럼 보통 악마들은 어떻게 해? ” 

? ” 

대답해 봐, 빨리. ”

날개를 뜯어서 스틱스 강에 한 번, 레테강에 한 번 적신 다음에 플레게톤 골짜기에서 바싹 말려 먹을거야. 그리곤 날개를 뜯긴 천사는 지옥불로 쳐 넣어버리겠지. ”

 

 

꽤 무섭고 모욕적인 이야기였을텐데도 불구하고 천사는 양 팔을 꼬아 끼고는 그렇지, 그렇지, 하며 혁재의 말을 들었다.

 

  

, 똑똑하네. ”

지금 네 앞에 있는 건 뭐야? ”

“ ... ”

말해 봐, 빨리. ”

무방비 상태로 일행도 없이 날개까지 편 채 악마 앞에서 날아다니는 불쌍한 오으수스. ”

맞아. 그리고 내 이름은 이동해야. . 그럼 이제 빨리 잡아 가, . ”

   

 

....뭐지, 이 또라이는?

 

 

 

 

 

***

 

 

 

 

 

얼마나 더 가야해? 왜 이렇게 멀어? ”

“ ... ”

다리 아프다고, 다리. ”

날아가, 그럼. ”

싫어. 너도 걷잖아. ”

 

 

널 잡아 갈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헛소리 하지 말고 제발 꺼지라는 혁재의 말에도 동해는 그런 게 어딨냐며 악마면 악마답게 굴라면서 혁재에게 떼를 썼다. 결국 네 멋대로 해라, 하며 모른 척 제 집 쪽으로 걸어갔더니 어느새 날개를 접은 동해가 강아지마냥 졸졸 혁재의 뒤를 따라 집까지 왔더라.

어이가 없고, 조금 기가 막히기도 해서 속으로 허, 하고 몇 번이고 헛웃음을 뱉은 혁재가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제가 사는 아파트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엘리베이터는 처음 타 보는 모양인지 이딴 상자에 타고 그래, 인간들은...’ 하고 중얼거리는 동해를 보며 천사 치고 말본새가 곱진 않네하는 편견 가득한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16층에 도착. 숨이라도 참고 있었던 모양인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동해는 푸하, 하고 가뿐 숨을 몰아 내쉬었다.

 

 

왔습니다. ”

 

 

도어락 위에 손을 얹으니 자동으로 철컥, 문이 열렸다. 다녀왔다는 인사를 건네는 혁재의 목소리에 거실에서 영화를 보고 있던 종운이 혁재를, 그리고 혁재의 뒤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가고 있는 동해를 힐끔 보고는 다시 TV 화면에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묻기를, 

 

 

뭐야, . ”

오으수스래여. ”

. ”

 

 

? ? 쟤도 나 천사인 것만 알고 끝? 이쯤이면 악마들 종족특성이 원래 남들한테 그닥 관심이 없는 건가 싶었다.

 

 

 

 

***

 

 

 

 

혁재는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3인분의 저녁식사를 만들고 있었다. 그 사이 동해는 종운의 옆에 앉아 종운이 아까부터 새로 보기 시작한 동물원 어쩌구 하는 영화를 함께 보고 있었는데 꽤 집중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보니 종운과 취미생활이 얼추 맞아 보였다.

형한테 점수 좀 따겠네, 저거.

 

거실의 두 사람을 바라보며 피식 웃은 혁재가 윗쪽 찬장에서 그릇 한 벌을 더 꺼내 식탁 위에 놓았다.

 

 

잠깐 멈춰놓고 와서 밥 먹어요. ”

   

 

한참 감동이 넘쳐 흐르고 있는 장면이었건만 종운은 혁재의 부름에 망설이지도 않고 정지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동해가 아쉬운 입맛을 쩍쩍 다시며 종운의 뒤를 쪼르르 따랐다. 그러고 보니까 쟤 아까부터 날아다니네. 창문마다 암막커튼을 쳐 놓은지라 안 그래도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이 어두운 집 안에 홀로 반짝이며 날아다니는 천사의 모습이 어찌나 이질적인지.

종운이 늘 앉던 제 자리에 앉아 식사를 시작하는데 어쩐지 동해는 한 손에 숟가락을 들고도 쉽사리 입에 넣지 못했다.

 

 

 안 먹어? ” 

“ ....이게 악마들이 먹는 음식이야? ”

? ”

새까매... ”

   

 

그러더니 눈을 질끈 감고 입에 가득 우겨 넣는데, 이내 동해의 눈이 반짝 뜨였다.

 

   

, 맛있다. 지옥 음식 맛있네! ”

“ ....뭐래, 이거 짜장이야. ”

 

 

혁재의 말을 들은건지, 아닌건지 연신 맛있다를 외치며 동해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짜장밥 한 그릇을 다 비워냈다. 그리고는 부른 배를 통통 두드리며 날개를 펴고 나풀나풀 날아가 소파 위로 가볍게 떨어져 뒹굴거리는데 날개에서 떨어지는 빛가루가 소파 위, 그리고 그 아래를 하얗게 덮었다. 종운이 인상을 찌푸리며 호, 하고 짧게 바람을 불었더니 푸른색 불이 그 가루 위를 감싸며 순식간에 타올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동해는 종운이 내려놓고 간 리모콘을 만지작거렸다. 아무래도 아까 멈춰 놓은 영화를 다시 재생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 쪼끄마니. ”

“ ....? ”

. . ”

 

 

그 별명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지 동해가 영 떨떠름한 표정으로 되물었지만 장난스러운 표정의 종운은 그저 고갤 끄덕였다.

 

 

너 언제 가냐? ”

나 여기 살건데? ”

 

 

.....?

 

혁재가 제발 꺼져, ...’하며 끙끙거리는 소릴 냈다. 허나 그런 혁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종운은 그래? 하고 손가락으로 턱을 문지르더니 그럼 저기 끝 방 써하며 방까지 내주더라.

왜 저래, 진짜... 미쳤나봐. 하여간에 천사건 악마건 위 아래 사는 것들은 믿으면 안돼, 하고 혁재를 혀를 끌끌 찼다.

 

 

너 오으수스랬지. ”

 

 

식사를 마친 후 종운이 소파로 돌아가니 소파를 전부 차지하고 누워 있던 동해가 꾸물꾸물 몸을 움직여 종운이 앉을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마치 원래부터 이랬던 것처럼 자연스레 자리에 앉은 종운이 동해로부터 리모콘을 건네받아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는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동해에게 물었다. 동해 역시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채로 대답했다.

 

 

. ” 

맛있겠다, 오으수스 정도면. ” 

나 잡아 먹을거야? ” 

아니, 네 날개만. ” 

나 날개 떨어져도 살 수 있어? ”

죽을걸? ”

... ”

 

   

종운이야 원래부터 남들도 잘 신경 안 쓰고, 본인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사는데다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잔인한 행동들도 서슴치 않기로 정평이 난 악마인지라 그렇다 치지만, 저 살벌한 농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이동해는 뭔가 싶다. 쟤 어쩌지, 진짜 멀쩡한 애 맞나.

 

 

 

 

 

***

 

 

 

 

 

자려고 누워 있는데 살짝 열린 문틈으로 어렴풋이 빛나는 천사의 빛가루가 보였다. 빛가루가 바닥에 자잘하게 떨어져 있는 걸 보니 이 앞을 지나갔던 모양인데, 뭐지 싶어서 가만히 쳐다보고 있노라니 바닥에서 살짝 떠오른채 계속 문 앞 복도를 오가는 동해가 있었다.

 

열린 문 틈으로 빛가루가 꾸역꾸역 새어 들어온다. , 이동해가 문에 안 보이게 앞에 서 있구나 싶다. 혁재가 턱짓을 하니 문이 스르륵 열리며 그 앞에서 놀란 눈을 하고 있는 동해와 눈이 마주쳤다. 

 

 

뭐해? ” 

, 잠이 안 와서... 잠이 안 오잖아. ” 

너 인간계 처음 내려와봤지. ” 

? .. 아닌데? ”

그게 아니면 무슨 천사가 시차적응이 안되서 잠을 설쳐? ” 

“ ...나 그럼 어떻게 해? 어떻게 하면 잘 수 있어? ”

 

 

이 밤 중에 뭘 하고 저렇게 돌아다니나 했는데 정말 잠이 안 와서 혼자 떠돌던 모양이다. 혁재가 한숨을 푹 쉬고는 자리에서 동해의 등을 떠밀었다.

 

네 방으로 가 봐.

동해가 살랑살랑 둥둥 떠올라 제 방으로 날아갔다. 그 뒤를 따라가며 혁재는 동해가 흘린 빛가루를 바람으로 슬슬 치우며 걸었다. 꽤나 심심했고, 또 자고 싶었던 모양인지 동해는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잽싸게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고 누웠다. 혁재가 가만히 그런 동해를 내려다 보다 의자를 하나 끌어다 그 옆에 앉아서는,

 

 

좀 능숙해지면 굳이 이런 과정 없이 알아서 조절이 가능한데.... 넌 지금 처음이니까. ”

! ”

눈을 감고, 네 머릿속에 있는 시계를 찾아봐. ”

머릿속에 시계가 있어? ”

. 가만히 찾아봐. ”

“ ... ”

찾았어? ” 

아니, 아직. ”

 

 

4급 천사면서 그것도 못 찾네. 재능이 없나, 속으로 생각하다 동해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보았다.

천사들은 다 이렇게 생겼나. 곱고 예쁜 동해의 반질거리는 얼굴을 내려다 보며 생각했다.

 

 

... 보이는 것 같아, 시계! 은색이고 동그랗고... ”

그럼 그 시계 속의 풍경을 이 방으로 바꿔봐. 아니아니, 눈 뜨지 말고. 시계에 집중해. ” 

 

 

혁재의 말을 들으며 계속해서 꼼지락거리던 손장난이 멎어들고 이내 동해의 가슴팍이 고르게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된 건가? 진짜 잠든 거 맞아? 손을 뻗어 동해의 눈 위에서 흔들었는데도, 동해의 눈커풀은 잠잠했다. 얘 완전 애네, 애야.

 

 

 

 

 

***

 

 

 

 

 

, 이게 무슨 냄새야? 매운 냄새, 매운 냄새! ”

 

 

잘 잤는지, 냄새를 따라 팔랑거리며 혁재가 아침 요리를 하고 있는 주방까지 온 동해가 코를 킁킁킁, 하며 혁재의 등 뒤까지 날아와 혁재의 어깨에 제 턱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혁재가 움찔 놀라며 저리가, 하고는 동해를 밀어냈다.

 

 

우와아, 이게 모야아. 플레게톤강 스프야? ”

“ ....김치찌개거든? ”

 

 

이미 조금 전에 완성이 되긴 했지만, 조금 더 깊은 맛이 나라고 냄비 안에서 팔팔 끓이고 있는 김치찌개를 보며 플레게톤강 스프라느니, 하는 말을 던지는 동해를 보며 마침 주방으로 들어오던 종운이 흣, 하며 낮게 웃었다.

 

 

맛은 플레게톤강 스프랑 비슷해. ”

오와아, 진짜? 기대된다! ”

그나저나 쪼끄마니 넌 처음 볼 때부터 왜 반말이야. ”

나 오으수스라니까? ”

“ ....그래. 됐다. 밥이나 먹어. ”

 

 

아직 동해는 다른 존재의 계급이 낮고, 높음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성체가 된 지 얼마 안 된 모양이네. 그러지 않고서야 4급씩이나 되는 천사가 그딴 것도 못 알아들을 리가 없지. 딱 봐도 얘 머릿속이 꽤 복잡하겠구나 싶어 종운은 제 힘을 사용해 동해의 의자까지 빼주며 이해한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아무래도 이동해는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게 분명했다. 아까 김치찌개라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리에 앉은 동해는 제 앞에 놓은 숟가락으로 식탁을 톡톡톡 두드리며 플레게톤강 스프~ 플레게톤강~’ 하며 지금 막 스스로 작사작곡한 노래를 흥얼거렸다.

 

 

작곡 천잰데...?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흥얼거리는 음이 꽤 좋아 한 마디 장난식으로 던져 주었더니, 그새 신이 난 동해가 원래 4급 천사들은 이 정도는 기본으로 하지!’ 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두 사람을 보고는 종운이 피식피식 웃었다.

 

 

너 근데 언제 갈거야? ”

 

 

플레게톤강 스프라고 부르던 그 김치찌개를 호오, 호오 불어가며 참 맛있게도 먹고 있는 동해에게 또 다시 물었더니 동해가 진저리가 난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한 혁재를 바라보았다.

 

 

여기 살거라니까. ”

헛소리하지 말고. ”

그럼, 가고 싶을 때! ”

, 지 멋대로구만... ”

 

 

처음 봤을 때부터 지멋대로였지만, 참 꾸준히도 지 멋대로다.

 

 

너 여기 있는 거 다른 천사들이 알아? ”

.... 아니! ”

걔네들이 찾지 않겠어? ”

아냐. 나 몰래 빠져 나온 거라서, 아마 나 없어진 줄도 모를걸? ”

“ ....퍽도... ”

 

 

얘 어케 해영, 하고 종운에게 물으니 종운이 입을 삐쭉, 어깨를 으쓱 하며 그냥 냅둬, 했다. 그 뭐야, 김희철한테나 슬쩍 말해놓던지. 하는 말을 덧붙이면서.

그럴까, 그럼...

 

 

 

 

***

 

 

 

 

 

날이 그렇게 어둡지는 않은데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지라 비를 좋아하는 혁재는 거실 커튼을 활짝 열어 놓았다.

 

아침부터 얼큰한 김치찌개를 먹고 디저트로 상큼한 파인애플까지 먹은 동해는 신이 나서는 거실을 둥둥 떠다니다 방금 전에야 소파로 안착했다. 그리고는 이번엔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보석처럼 세상을 덮고 있다는 가사를 흥얼거리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이 세상에 온 게 처음이라면 비를 보는 것도 처음일테지. 소파에 턱을 괴고 엎드려 저어기 창 밖으로 내려다 보고 있던 동해를 바라보던 혁재가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설거지를 마치자마자 방으로 들어가 멀끔한 옷을 차려 입고 나왔다. 갑자기 바뀐 혁재의 옷에 창 밖의 빗소리를 듣던 동해가 고개를 돌리며 어디 가?’ 하고 물었다. 그런 동해의 손목을 잡고 제 방으로 향한 혁재는 옷장을 열었다. 어디 보자, 나랑 체형이 얼추 비슷한 것 같은데... 뭘 입힌담.

 

고민을 하다하다 너 입고 싶은 거 입고 나와, 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주었더니 어디서 찾았는지 동해는 있는지도 몰랐던 흰 바지에 흰 티를 입고 나왔다. 누가 천사 아니랄까봐 올화이트라니. 동해의 패션센스에 학을 뗀 혁재가 기겁을 하며 다시 방으로 들어가 동해에게 청바지 하나를 안겨 주었다.

 

 

? 나 이렇게 입으면 안돼? ”

안 되는 건 아닌데... 그냥 이거 입자. ”

 

 

제발, 고집부리지 말고 입어줘.... 하는 혁재의 속마음이 전달이라도 됐는지 동해는 그랭!’ 경쾌하게 외치고는 옷을 갈아입은 채로 혁재를 따라 집을 나섰다. 혁재는 동해의 손에 제가 늘 쓰고 다니던 파란 장우산을 쥐어 주었다. 그리곤 저는 집에서 잘 안 나가는 종운이 딱 한 번 썼던 짙은 밤색의 우산을 꺼냈다.

 

인간들은 뭐 이런 상자같은 걸 타냐며 동해가 싫어하던 엘리베이터를 타고 밖으로 나가니 폐부로 밀려 들어오는 맑은 산소가 상쾌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나올걸! 하며 폴짝폴짝 신이 나 신발이 젖는 것도 개의치 않아 하는 동해를 보며 혁재를 오늘의 행선지를 백화점으로 정했다. 언제까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입힐 건 입혀야 하잖아, 하는 마음에.

 

 

동해. 자꾸 그렇게 쿵쾅거리면서 걸으면 바지가 다 젖어. ”

물 튀는 소리가 예뻐서 그래. ”

물 떨어지는 소리는 더 예쁠걸. 그러니까 그렇게 걷지 말고, 차라리 날아가. 너 사람들 눈에 안 보이게 할 수 있잖아. ”

싫어. 너랑 같이 걸을거야. ”

 

 

그러고 보니까 처음 만났던 날에도 혁재와 같이 걷겠다고 했던 것 같다. 굳이 왜....? 이해할 수 없는 동해의 행동에 혁재가 의아한 듯 두 눈에 물음표를 띄웠다. 그랬더니 오히려 동해가 고갤 갸웃하며 그 자리에 멈춰섰다.

 

 

너 몰랐어? ”

? ”

, 너 좋아서 따라온건데? ”

“ ....?...? ”

태어나서 본 것들 중에 네가 제일 잘생겼고, 예뻐. ”

 

 

태어나서 본 것들 중에 내가 제일 잘생겼고, 예쁘다고? 혁재야말로 태어나서 이런 소리는 또 처음 들어보는터라 뭐라 대답해야 할 지 조금 난감했다. 세상 모든 아련함은 전부 담고 있는 것 같은 눈의 이동해는 제 멋대로였던 것만큼 솔직하고, 직설적이었다.

성체가 된 지 얼마 안 된 것 같다고 했던 종운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이런가. 애가 필터를 거칠 줄을 몰라.

 

 

원래 본능적으로 자기보다 강한 존재한테 끌리기 마련이긴 한데, 천사가 악마한테 끌리는 건 좀 아니지 않아? ”

그것도 본능인가 보지, . 내가 잘못 된 것 같진 않아. ”

잘못 된 것 같진 않아? ”

. 너 되게 괜찮은 애 같은데. ”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어쩜 동해의 말은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게 터져나온 고백이 아닐까 싶었다. 이런 고백을 들은 주체가 자신이라는 생각을 하니 혁재는 갑자기 달아오르는 얼굴을 숨길 수가 없었다. 붉은 얼굴을 한 혁재는 혹시 동해가 보기라도 할새라 걸음걸이를 빨리 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제 속도와 맞춰 걸어주던 혁재가 갑자기 앞서 나가자 당황한 동해 역시 좀 더 빠르게 걸으려는데,

 

 

그으으으으으르르.... ”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짖는 소리와 함께 차갑고 질척한 무언가가 동해의 발목을 죄어왔다. 그리고는 강한 힘으로 끌어 당기는데 제 발 끝부터 서서히 사라지는 저의 모습이 눈으로 보이는지라 놀란 동해가 날카로운 소리로 혁재의 이름을 불렀다. 그 소리에 저어만치 앞서 가던 혁재가 고갤 돌렸고, 동해의 발을 옥죄고 있는 것을 발견하자마자 차마 인간의 눈으로는 눈치도 못 챌 정도의 속도로 동해에게 다가와 발 밑의 그 검은 것을 신발로 짓밟았다. 그러자 그것은 그륵, 그륵 소름끼치는 소릴 내며 혁재의 발 끝으로 흡수되는 것처럼 보였다.

 

 

.... 뭐야...? ”

 

 

사색이 된 얼굴의 동해가 물었다.

 

 

아니, 무슨 오으수스가 고작 10급짜리 하급 요괴한테 공격이나 받고 그래? ”

저런 거 처음 봤어, ... ”

대체 천계에서는 뭘 가르치는 거야. 할 줄 아는 게 없어... ”

... ”

이렇게 할 줄 아는 게 없으면, 무슨 일이 생길 지 모르니까 기운이라도 숨기고 다녀. 어차피 날아다닐 것도 아니라며. ”

“ .... ”

혹시 기운 숨기는 것도 몰라? ”

“ .... ”

“ ....그래. ”

 

 

얘 천사는 맞나...

 

 

 

 

 

***

 

 

 

 

재밌다. 이것도 맛있고, 음악도 신기하고... 너도 있고! ”

 

 

그래, 좋을 때 맘껏 즐겨라. 옷을 사러 가서는 여기선 뭘 사야해?’ 라고 묻길래 너 입고 싶은 거라고 대답했더니 정말 입고 싶은 걸 다 골라온 동해 덕에 혁재는 양 손에 피도 통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쇼핑백을 들고 동해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런 혁재의 노고를 아는지, 모르는지 동해는 요거트 스무디를 쪼옥 빨며 딸려 올라오는 작은 얼음조각을 까닥, 하며 씹었다. 얼음 깨지는 소리가 이동해의 성격 만큼이나 통통 튀는 것 같이 들렸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옷까지 사주는데 솔직히 한 번 말해봐. ”

? ”

아무리 봐도 천계에서 네가 혼자다니게 두지 않을 것 같단 말이야. 대체 어떻게 왔어, 여기까지? ”

 

 

그 물음에 동해가 또 대답을 하기 싫은 모양인지 우물쭈물하며 먹던 스무디 컵까지 내려놓았다. 허나 이내 들려 온 혁재의 쓰읍, 하는 꾸짖음 소리에 동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대천사님 궁에서 아래를 보고 있는데 대천사님께서 내려가신 오로라길이 아직 열려 있었어. 그래서 그걸 타고... ”

그 오로라길이 이 쪽으로 나 있었어? ”

그랬나? 아무튼, 내려왔더니 여기였고... 난 다시 올라가는 법을 모르는데, 마침 네가 지나가잖아? 그런데 네가 너무 잘생겨서... ”

잠깐, 잠깐. 알았어. 그만, 그만. ”

 

 

얘가 또 누굴 당황시키려고.

아무튼 동해의 말을 듣고 생각해보면, 그 누군지 모를 대천사가 하필이면 호기심 가득한 이동해를 조심하지 않고 길을 열어 놓는 터에 생긴 해프닝인 모양이다.

 

무자비한 대학살이 있었던 그 옛날 후로 천계와 하계의 조약 때문에 비슷한 계급끼리의 천사와 악마들은 서로가 하는 행동들을 맘대로 제어하지 못했다. 아마 이동해를 챙기던 그 대천사는 혁재와 종운이 살고 있는 집을 가득 덮은 종운의 기운 때문에 제 기운을 숨길줄도 모르는 이동해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걸 말해줘야 하나. 가기 싫다는데 그냥 둘까.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리며 생각하던 혁재가 머리 아픈 건 딱 질색이라는 식으로 고개를 두어번 젓고는 겁도 없이 또 혼자 걸음을 옮기고 있는 동해의 뒤를 따랐다.

 

 

 

 

 

***

 

 

 

 

쟤 왜 어제부터 안 날아다녀? ”

? 날기 싫은가보져. ”

천사들이 발이 얼마나 약한데. 왜인지 나중에 직접 한 번 물어봐봐. ”

 

 

천사들 발이 약해? 그렇구나. 혁재가 고갤 끄덕거리며 기억에 새겨 놓고는 주방으로 가 진한 커피 한 잔을 내렸다. 그리고는 잔에 커피가 차 오르는 동안 저어기 보이는 동해를 쳐다보는데 지금의 이동해는 요 며칠 보았던 것과 확연한 차이가 있어 보였다.

 

 

동해, 이제 돌아갈 때도 되지 않았어? ”

 

 

소파에 길게 누워 있던 동해가 싫다며 고갤 저었다. 잠도 늦게까지 자고, 아침도 안 먹더니 기운까지 없어 보이는데 그 와중에 싫다는 표현은 또 꽤나 분명하다. 사실 쟤가 뭘 하든 말든 상관이야 없긴 한데(애초에 이 집에 들어온 것부터가 지 맘대로였고, 몇 번이나 가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들어먹질 않으니) 종운까지 이야기를 꺼낼 정도라면 확실히 문제가 있긴 있다. 결국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인상을 쓰던 혁재가 자리에서 일어나 동해의 앞에 서며 말했다.

 

 

, 날개 좀 펴 봐. ”

 

 

동해가 또 고갤 도리도리 저었다.

 

 

쓰읍... ”

 

 

그제야 쭈뼛거리며 일어난 동해가 날개를 펼쳐냈다. 날개가 펼쳐짐과 동시에 빛을 잃은 날갯깃들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 ....! ”

 

 

제 상태가 이런 걸 알고 있었던 모양인지 동해가 죄라도 지은 듯 고갤 푹 숙였다. 대체 이 지경이 될때까지 말도 안 하고 뭘 한 거야. 괜히 욱해서는 오만 인상을 다 쓴 혁재가 한 마디 혼이라도 내려고 입을 여는데 갑자기 거실 베란다 창문이 부서질 듯 시끄럽게 흔들렸다. 그리곤 몇 초 후, 문이 열리면서 그 안으로 하얀 날개를 활짝 편 천사 다섯이 날아 들어왔다.

 

 

이동해! ”

동해야, 괜찮아? ”

너무 옹졸한 행동 아닙니까? 성체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오으수스를 잡아가다니. ”

 

 

....잡아 가? 내가? 갑자기 몰아 붙이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혁잰 생각했다.

 

 

“ .....데려가, 제발.... ”

 

 

.

.

.

 

 

동해가 저들에게 어떤 존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들은 아무래도 혁재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니, 어떤 생각을 가지면 이동해를 저렇게 온전한 피해자로 볼 수 있지? 대단들 하다, 생각하며 혁재는 더 이상 그들에게 제 입장을 변호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마 혁재의 이런 행동이 그들의 불편한 심기를 자극한 모양이었다. 아까부터 저 뒤에 혼자 빠져 있던 누가 봐도 대천사인 정수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혁재의 머리 끝부터 발 끝을 기분 나쁘게 훑었다.

 

 

잠깐. 하나 더 있지, 지금. ”

 

 

그러더니 정수가 빠른 걸음으로 혁재를 지나쳐 가, 종운이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 , 대천사라서 그런가. 형도 대놓고 기운을 내뿜고 있는 편은 아닌데... 예리하네.

갑자기 방 안으로 쏟아지는 빛에, 안에서 영화를 보고 있던 종운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곤 불쾌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정수를 보며,

 

 

여기 뭐 그리 대단한 게 있다고 대천사님께서 직접 강림을 하셨을까. ”

“ ....김종운? ”

 

 

정수가 그제야 알았다는 듯 인상을 쓰며 거실로 나가 동해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자 동해의 날개가 눈부시게 빛나며 날갯깃이 다시 윤기를 되찾았고, 바닥으로 떨어져 있던 동해의 오염 된 날갯깃들은 바닥으로 녹아 스며 들었다.

아무래도 정수는 저와 같은 급인 종운을 보는 순간(심지어 이미 오래 전부터 아는 사이라 그의 성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본인들이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것 같았다.

 

 

그만하고 이만 가자. ”

안 가여, 싫어! ”

 

 

허나 혁재가 잠깐이나마 간과한 것처럼, 이들의 상황에 있어서 복병은 막무가내인 천사들이 아니었다. 자아가 너무나도 확고해 이 곳으로 스스로 파고 든 동해가 가장 큰 문제이리라.

 

 

문제가 뭐야. 왜 안 가겠다는건데. ”

“ ... ”

이동해. ”

나 얘 좋아! 얘랑 같이 있고 싶단 말이야! ”

 

 

동해의 간결한 외침이 이들 사이를 거세게 뒤흔들고, 이들은 말 하는 법을 잊기라도 한 듯, 고요해졌다. 그리곤 어버버 하는 얼굴로 서로만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이 말도 안 되는 정적을 깬 건, 이 상황에 대해 보고 받고 달려 온 악마 희철이었다.

 

 

... 대단한 천사를 한 마리 키우네. 무슨 일들이야, 대체. ”

? 희님 왔어영? ”

 

 

그닥 작은 집은 아니지만 활짝 펼치면 3m는 족히 되는 날개들을 접지도 않고 서 있으니 이 거실이 상당히 좁아 보였다. 그래서인지 희철은 집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은 채로 베란다 창 밖에 둥둥 떠서는 기가 막히다는 듯 웃었다. 그리곤 정수를 향해 뭔데 너까지 왔어?’ 하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혁재는 하계에서도 유명인사들인 종운과 희철이 모두 정수와 알고 지내는(그것도 꽤 친분이 있거나, 오래 안 듯한) 사이인 것 같아 흥미로운 얼굴을 했고 정수는 영 골치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김희철, 김종운. 잠깐만. ”

 

 

동해와 혁재를 포함, 정수와 함께 온 천사들 중 시원, 려욱, 규현만을 거실에 남기고 천사 측에서는 정수와 영운, 악마 쪽에서는 희철과 종운, 이렇게 넷이 따로 종운의 방에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이야기에 따르면 동해는 천계에서도 주목하고 있을 정도로 강한 천사가 될 아이라 했다. 4급 오으수스라는 신분이 무색할 만큼.

그렇게 많은 힘을 담고 있는 아이라 성장도 이상할 정도로 많이 느렸고, 그런 이유로 다들 동해를 부둥부둥 아끼기만 했을 뿐, 아직 추가로 이루어진 교육은 없었다고 한다. 그 와중에 이런 일이 터진데다, 심지어 동해가 발견 된 곳이 고위급 악마가 살고 있는 곳이니 다들 적잖게 당황을 했던 모양이다.

 

 

인사 해, 빨리. ”

안 해. 다신 못 보게 되는 것 같잖아. 그럼. ”

다음에 네가 능숙한 천사가 되면, 그 때 보면 되잖아. ”

 

 

동해는 결국 천계로 강제 압송되었다. 가지 않겠다고 그렇게 발버둥을 쳤으나, 저보다 계급도 높고 몸집도 큰 천사들(시원, 영운)에 의해 거의 끌려가다 시피 했다. 그렇게 그들이 모두 사라지고 난 후, 종운은 재미있는 며칠이었다며 시원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저렇게라도 간 게 다행이라고 했다. 사실 기운을 조금 숨겨 주는 것은 문제될 일이 아니었으나 이 곳에 있었으면 동해는 저와 상성되는 강한 기운들에 억눌려 제가 가지고 있는 능력들을 키워나갈 수 없을 것이라 했다. (동해의 날개가 상했던 이유가 이것이었다. 동해와 함께 있던 종운, 혁재의 기운이 워낙 강했기에 동해가 빠른 속도로 그에 오염이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희철의 말에 의하면 대천사 박정수가 유난히도 아끼고, 어화둥둥 내새끼 할 정도로 껌뻑 죽는 아이라 하니 조금만 성장하면 금방 또 제멋대로 탈출할 것이라며, 너무 아쉬워 말란다. 조만간 또 올테니까 그 때나 너무 심술부리지 말고 예뻐해주라며.

 

 

그 날 이후 혁재의 집 베란다엔 며칠 간격으로 하얀 날개깃이 날아들었다. 처음엔 털도 몇 가닥 남지 않은 깃대만이더니, 어떤 날은 반이나 잘려나간 것이었고 또 어떤 날은 까맣게 그을린 것이기도 했다. 그러다 온전하게 빛나는 깃털이 하나 도착한 후부터는 두 개, 세 개, 하며 갯수가 늘어났다.

 

 

오늘은 다섯개네. 많이 늘었나보다. ”

 

 

아침에 눈을 뜨고 거실에 나오자마자 베란다에서 일렁이는 반짝임을 발견한 혁재가 베란다에 중구난방 흩어져 있는 깃털 다섯개를 주워 소중히 한 손에 그러쥐며 웃었다.

 

 

뭐하냐. 저걸로 뭐할거야. ”

나중에 오면 저거 모아서 베개라도 하나 만들어주려구요. 푹신하겠다. ”

 

 

혹시나 저를 잊기라도 할까봐 꾸준히 제 존재를 알리는 저 성의가 귀여워서라도 혁재는 동해의 마음이 담긴 편지나 다름없는 저 깃털들을 동해가 쓰던 방 침대 위에 수북히 쌓아 놓았다.

 

어서 커서 돌아 와, 이동해.

네 마음들이랑 같이 기다리고 있어.